평택임씨(平澤林氏) 갑신보(甲申譜 1764年) 서문(序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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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351회 작성일 23-10-11 02:55본문
평택임씨(平澤林氏) 갑신보(甲申譜 1764年) 서문(序文)
씨족(氏族)의 족보(族譜)라는 것은 험난한 과정을 지나지 않을 수 없으며 성을 갖고자 하는 사람의 마음은 그 욕구가 매우 큽니다.
종법이 근본이 하나임을 잊지 않고서 골격을 다치지 않고 요점만을 골랐다면 오늘날 별도의 화두가 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만일 고증으로써 사사로운 것을 없애고 사실이 없는 것을 바로 잡았다면 족보를 만드는 본래의 뜻에 위배되는 것이며,조상을 욕되게 하고 후세를 더럽히는 것이므로 차라리 족보가 없는 것이 더 낫습니다.
따라서 옛 사람께서는 “전해온 것에 반신반의 하면서 그것을 후세에 전하는 것이 족보 작성의 큰 틀”이라고 말하셨습니다.
우리 林氏로 말하자면 그 기원이 오래 되었는데,學士公께서 中國에서 오셔서 평택의 용포평이 수풀이 뒤덮여 이 곳에 거주지를 정하셨고,이 때부터 가문이 시작되었지만 연대가 상세하지 않고 소목이 불명한 즉 자손들이 얼마나 개탄스러웠 겠습니까.
忠貞公 부자에 이르러서야 높은 직위를 얻어 高麗 말의 명신이 되었습니다.
훈련公부터 시작해서 우리나라 조선의 벼슬을 살았으며,뛰어난 실력으로 공훈의 명부에 이름을 올린 이후 대대로 집안의 명성을 이어오셨습니다.
진위公은 악을 증오하고 강직하셨고,삼청당公께서 명리를 거절하신 것이나 촌초당공의 지극한 효행과 지조는 삼대에 걸쳐 실천해야 하는 아름다운 본보기가 될 정도로 크고 뛰어나셨습니다.
그리고 금호,송파,관해 삼부자의 절개와 의리는 그 문장을 족보에 기록하였습니다만 상세한 것은 후손이 자세히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울러 병사公께서는 충성스러운 마음과 적과 싸우려는 의지를 떨치셨습니다. 감역公께서는 하늘이 내신 독실한 효자로 지금까지 자손의 법도로 받아들여져서 전해 오고 있습니다.
우리 임씨를 아는 사람들은 모르긴 몰라도 6~7은 公이 청렴한 명망과 곧은 절개를 다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 슬플니다.
운이 쇠약해져서 집안이 미미해졌고 인물이 나지 않아 온 나라 안에 있는 임씨들이 조상의 공덕을 이어갈 사람이 없으니 이 어찌 우리 선조가 근본올 닦아 자손을 번성시키고 깊은 뿌리를 이어져 내려오게 한 깊은 뜻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천도란 순환하며 다시 돌아오는 것이므로 크게 되려고 하지 않고 사람 사는 일에만 머무른다면 어찌 우리 모든 林氏들이 각자 권면한다는 소식이 들리겠습니까?
유감인 것은 절도公의 맏아들의 갈래,즉 금호公의 맏형의 자손이 흩어져서 지금까지 어디에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고향을 기록할 수가 없었고,충주 일파는 학사公의 자손이나 아마도 그 족보의 기록이 오래되어 없어졌을 것입니다.
이는 마치 경엽 장군의 충성과 절개를 세상에 드높이고 일월을 밝게 한 公이 한 나라의 수정후 관운장과 송나라의 악비 장군과 함께 깃발을 나부끼면서 대오를 같이 할 정도인데도 애석하게 그의 조상에 대한 수대에 걸친 문헌에 증거가 없는 고로 族譜에 이 또한 넣을 수가 없었던 것과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요즘 회한이 있는 사람들이 많이 몰려와서 나중에 중간 할 때 들은 것을 근거해 달라고 합니다.
族譜의 본말에 대해서는 재종형 경훈씨,종형 엽씨, 종친 어른 태악씨가 오랜 정성을 들여 세상을 떠난 불쌍한 부군이었던 금재公에 대한 뜻을 모았고, 이전 사 람들은 그의 말을 기록하지 않았으나 오늘날 족보에 명기하였으니,어찌 그것이 우연이라고 하겠습니까?
나와 같이 족보를 만든 모든 사람들이 비록 서로의 파와 계보가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애초에 한 분으로부터 그 후예가 나온 것이므로 이는 나무의 가지와 줄기가 천 개나 만 개라 하더라도 오직 뿌리는 하나를 공유하는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즉,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 간의 우애의 마음은 돈독하고 화목한 의리를 강요하지 않더라도 구름이 힘있게 만들어지듯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 족보가 반드시 있어야 하는 이유는 혹시라도 임씨 성을 갖고자 하는 사람의 마음이 크기 때문으로 종법이 그 근본을 잊지 않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족보에 이미 이름을 남기신 여러 公과 관련된 나머지 근거가 없는 기록들을 선대의 일로 기록해야 하는데 아무런 문장의 근거 없이 감히 그것을 따라 서술할 수는 없었습니다.
숭정 기원 후 세 번째 갑신년 7월 하순 후손 흥렬 서술(敍述)